'깨끗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약 먹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라고...
"예전에 해보셨으면 그때 들은 말 없으십니까?"
초음파 검진을 하던 의사가 간을 훑던 영상을 멈춰 놓고 묻는 말에, 십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대답했다.
"예, 지금 제가 드릴 말씀과 똑같습니다. 일단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고요, 요기 요건 제 판단에는 혈관종으로 보이긴 합니다만... 일단 추적관리는 필요하니 내년에 꼭 다시 찍어보세요"
조직검사 결과 보는 날.
지난번에 일정이 빡빡해 함께하지 못했던 복부 초음파 검사를 했고, 강낭콩만 한 것 6개 떼어 낸 대장 용종의 결과도 선종으로 통보받았다. 결과가 나온 일부 혈액검사 역시, 추적 관리가 필요할 수준이지만 약물에 도움받을 정도는 아직 아니라고 하고...
"원낙 큰 것을 떼어 냈으니 열흘간은 절대 금주하라"던 협박이 끝나는 순간이다.
금식하고 찾은 병원에서 대기하는 동안 갑자기 잡힌 새 일정.
정오가 끄집어 달리니 우선 뭐 좀 먹어야겠어 일단 집으로 돌아와 밥통에 남겨 둔 한 끼를 박박 긁어먹고 며칠간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설거지를 마치고 담배 한 대 막 무는 무렵 걸려 온 전화.
갑자기 잡힌 일정이 취소된 건 상관없는 일인데, 그것 때문에 일부러 집에 들렀는데 오랜만에 물 구경한 몸으로 그대로 집에 처박혀 있기가 뭤하다.
남들 들으면 먹고사느라 종종 거리는 줄 알겠지만, 그제 잡부 다녀오고 어제 종일 뒹굴거렸으니 남는 게 시간인 놈이, 이상하게 모처럼 한가한 짬을 낸 듯한 기분이 자꾸 든다.
'그래, 생각났을 때, 아저씨게 다녀와야겠다'
필수 아저씨.
장례 모신 것이 벌써 지난 3월이란다.
어린 내가 겨울 방학을 맞아 찾은 외할머니댁.
어떤 과정이었는지는 기억 없어도, 공기총을 둘러 맨 두 형제 뒤를 쫓아 코를 질질 흘리며 산과 들로 쫒아다니던 단편의 기억.
"매형, 매형"하며 아버님께는 각별하던 어머님 육촌 두 형제.
그 작은 아저씨 부음을 접한 것이 얼마 전.
맘이 영 서운하던 차에 생각난 김에 해 넘어가기 전 부의금 봉투를 들고 찾아뵀다.
'아저씨, 죄송해요. OO이가 웬만하며 외가 대소사 다 알려주는데 기별이 없었어요...'
"허허... 우리가 웬만한 축에 안 드는 모양이지. 허허허"
할아버지께서도 그랬고, 두 형제분도 술을 워낙 좋아하시니 그렇게 운명하셨거니 짐작했는데, 집에서 주무시다 급사하셨단다.
사람 살고 죽는 것이야 의지대로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또 한 시절이 맥없이 지워져 가는 일을 바라본다는 게 참 서운한 맘이다.
큰 누님.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고 늘 서운했는데,
내가 떼어 낸 용종이 악성이라 지금부터 치료에 들어간다 치면, 딱 누님 나이다.
"이 것 이대로 일 년만 더 지났으면 틀림없이 악성으로 변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우유주사 여파로 헤롱 거리며 듣던 검진 결과.
조직검사도 선종이라니, 아직은 할 일이 남아있습인가보다.
"자장면이라도 시켜 줄 테니 먹고 가라"는 아저씨와 헤어져 돌아오는데, 실효된 금주령이 슬슬 목구멍을 간지럽힌다.
'뜨끈한 짬뽕국물에 베갈이나 두어 병 먹고 들어갈까?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먹고 들어갈까?'
고민하는 차에 걸려 온 친구의 전화.
"오늘 9일째 인디 어뗘?"
자르르르 번지는 첫 잔의 술기운.
대패삽겹살에 밥까지 볶아 두둑하게 먹고 돌아왔다.
9일.
군인 시절만 빼면 내 생에 최장 금주.
잠시 멈췄던 시간.
필부필부의 삶으로 지금의 나는 웬만하다.
Soundtrack_Orchestra·Emmanu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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