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인연을 쫓아 사라지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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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옛 인연을 쫓아 사라지는 것들.

by 성봉수 2021.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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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단을 온통 점령해버린 폭군 앵두.
 혼자만 성한 가지와 나뭇잎으로 세를 불린 부작용이 너무 크다.
 "나무는 큰 나무 덕을 못 봐도 사람은 큰 사람 덕을 보는 법"이라던 어머님 말씀,
 옛말 그른 것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나마 손 보지 않아도 때를 알리던 맨드라미, 봉선화, 채송화 이것저것 화초들이 차츰차츰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뒤돌아서면 어느 틈에 음식물 쓰레기를 팍팍팍 묻어 놓는 옆방 아줌마 덕분에 두엄 통이 되어버린 것과 다름이 없는 데다가(오죽하면 모종삽을 감춰 놓기까지 했어도, 만세 부른지 오래다), 작년 가을 난 분갈이를 하며 포기 나눈 여분의 것들을 마땅하게 처치할 방법이 없어 화단에 쌓아 두기까지 했으니 당연, 잡초조차 버텨낼 재간이 없다.
 마치 깊은 산속 볕이 잘 드는 노송 아래에 솔잎만 수북이 쌓여 있는 꼴이다.

 그런 폐허를 비집고 자주 달개비 몇 잎이 위태롭게 순을 돋더니, 아침마다 꽃잎을 버느라 애쓴다.

 

오늘의 한 컷 _자주 달개비 ⓒ 詩人 성봉수

[자주 달개비 20210614_065610-오래된집마당] ▶본 이미지는 광고를 열람하는 방문자님의 후원으로 저작권 없이 무료 배포합니다◀ 詩人 성봉수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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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당신의 지병에 효과 있다는 말을 잡고 둑방으로 어디로 눈에 띄는 곳마다 베어 처마마다 양파망으로 가득 담겨 매달려 있던 달개비.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집 안 구석구석 씨가 날려 뿌리를 내렸던 달개비.
 당신이 심고 가꿨던 창포가 올 단오에는 딱 두 줄기 살아남은 것처럼, 달개비 또한 옛 인연을 쫓아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는듯싶다.

 



 달팽이 구충제를 사러 나가기로 계획을 잡은 날.
 아점을 먹으며 달력을 보니 마침 장날이다.
 잘 되었다.
 빠트리는 것 없도록 메모를 하고 집을 나서, 이끼만 피고 있는 여분의 스티로폼 화단 한 칸에 채송화라도 사다 심을 생각으로 시장을 거꾸로 돌았다. 계절이 가는 동안 피고 지기를 계속하는 꽃이긴 해도, 이미 두 순배 정도는 피고 졌음직한 채송화. 인간적으로 돈 주고는 못 살 상태라서 적당한 다른 것이 있는지 둘레 거리다가 포기했다.
 청양고추와 애호박 사서 들고 농약 방에서 달팽이 약(은 쥐약 같이 먹고 죽게 하는 유도제 밖에는 없다네. 분무기로 뿌리는 것이 있으려니 했는데….)과 진딧물 약을 사고 오이 망 제일 작은 것으로 하나 사고 방앗간에 들렸는데, 막걸릿잔을 잡고 앉아 있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그냥 지나치기는 서운하고, 시원하게 갈증이나 넘길 생각으로 맥주를 시켰는데,

 

 

기본 안주로 나온 김치가 익은 것도 안 익은 것도 아니라 쓰다. 그렇다고 맥주 세 병 먹으며 전을 시키기도 그렇고... 메뉴판에서 제일 만만한 달걀말이를 시키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작은 사장님이 잘해준다고 신경 써서 뚝딱거려 나온 놈 또한 아니올시다다. 재료가 전부 각개전투에 아무 맛도 없다.

 

 



 단지, 지나치기 서운해 들렸던 방앗간.
 그래서인가?
 나 역시도 그 시간과 공간에 녹아들지 못하고 맥주 세 병에 취기가 돌고 몸이 힘들다.
 혼술도 못 하겠다.
 다 됐다.

 

 

 

 
 20210614월
 강병철과샄태기/수수께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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