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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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불멍.

by 성봉수 2023.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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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중학교 들어가던 해, 섭골 작은할머님께서 결혼을 앞둔 큰 누님 예물 이불 꾸미러 시내 장조카 집에 내려오셨습니다.
 "아이고 작은어머님, 주무시고 내일 올라가셔유!" 라는 어머님 말씀에,
 "조카 댁, 나도 그러고 싶지만, 돼지 구정물이야 하루 안 줘도 되지만 가이 땜에 안댜. 내가 그눔에 가이 땜에 꼼짝을 못 한다니께. 내자니 혼자 사는 큰집이 너무 썰렁허고 기르자니 한시도 집을 못 비우겠고..."

 3박 5일 일정이니 오고 가며 공중에 날리는 시간을 빼면 2박 3일 예정의 첫 해외 여행.
 막상 떠나려니 단도리할 집안일이 뭐가 이리 많은지...
 베어 놓은 토란대.
 다녀와서 하기엔 너무 늦고, 떠나기 전에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작년 김장 소태김치 쏟아 놓은 것 쓰레기로 뒷마무리 하고, 비워 물에 담가 놓았던 김치통 닦아 밀쳐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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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으로 김장 출장 간 삼월이 언니 모셔온 오후 시작했는데, 말린 시간이 어정쩡한 탓에 어느 것은 잘 벗겨지고 어느 것은 안 벗겨져서 예상보다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벗긴 토란대를 솥에 안치고 작년 베어 놓은 감나무 도장지를 때며 자리 잡고 앉아 불멍 하며 이 생각, 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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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면 부동리가 친정인 작은 할머님은 장조카 며느리를 중매한 매파이기도 하셨고, 하나뿐인 형님이 삼대째 지켜온 본가를 처분하고 시내 아들 집으로 합가 한 후 서울서 자리 잡은 당숙과 떨어져 홀로 고향 집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여름·겨울 방학 때마다 어머님께서는 동생과 저를 작은할머님댁과 외가에 번갈아 며칠씩 꼭 다녀오게 하셨습니다. 어느 무렵엔 고기 근 끊어 주시며 다녀오라는 어머님께 등 떠밀려 아무 생각 없이 찾아뵈었는데,
 "외동아들이었던 당신 아들께서 못 된 짓이란 짓은 다 하며 깡패질하던 때, 속 썩은 지난 이야기와 '어머니, 저 아무래도 대학교에 가야겠습니다'란 후, 고 삼 졸업 전 6개월간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에 매진하며 개과천선해 지금의 공기업 간부로 인생 역전"하던 과정의 이야기보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담처럼 풀어놓으셨습니다. 얘기의 결론은, "당신 아들도 그리했으니, 성씨네 대주인  나도 그리해야 한다"는 타이름이었습니다. 제가 대가리 굵고 부모님 속 썩이던 시절 "작은 어머님, 아무래도 봉수 놈이 서방님 닮았나 봐유. 작은 엄니가 맘 좀 돌리게 잘 타일러 주셔유"라는 청을 받으셨답니다. 후에, 어린 시절 흉을 다 말했다고 당숙께서 나무라셨다는데, 아무튼 세상이 다 내 발아래로 보이던 그 천둥벌거숭이 시절에 일가친척 어른들께 고개 조아리고 앉아 그런 타이름을 받은 게 부지기수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찾아뵙고 무쇠솥에 낭구 때서 해주시는 밥 먹으며 든 정이 깊어 작은할머님과의 기억은 지금도 각별합니다. 
 무릎관절염에 거동이 불편해졌던 어느 가을, 당숙모의 손에 끌려 온다간다 말씀도 없이 하루아침에 서울로 올라가시고, '명년 봄 따뜻해지면 돌아오려니...' 하시더니. 그 많던 장독이 하나둘 깨지고 "친정 큰 오라버니께서 설계하셨다"고 자랑하시던 양반집은 기와가 하나둘 허물며 누옥이 되도록 기별 없으시다가 어느 해 부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작은할아버님 묘소도 이장해 가고 당숙께서도 아버님 장례식장에 조문 오셨을 때 마지막으로 뵙고, 운명하셨다는 소식을 건너 건너 들었으니 이젠 딸 셋에 아들 하나던 육촌 형제들은 물론이고 당숙모 안부도 알 길이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성공해 자리 잡은 서울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되지 못하는 종가이겠으나, 이 모든 것이 입신양명하지 못한 제 모자람이니 그저 현실은 씁쓸하고 기억은 쓸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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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따, 배고푸다'
 삶은 토란대를 건져 샘에 물 넘기며 생각하니, 삼월이 언니 친정에서 깁밥으로 채웠던 속이 빌 때가 되었습니다. 마침 걸려 온 친구 '자폐 1호'의 술청 전화.
 감자 없는 감자탕에 쐬주로 술밥 먹고 맥주로 입가심하며 시킨 곶감 안주.

 '왜 나만 계속 씨가 있는 겨?'
 희한해하는 내게 자폐 1호가 대답합니다.
 "가생이 걸 먹으야지!"
 지난번에도 '왜 서재에만 앉으면 담뱃재가 계속 떨어지지?'라던 제 물음에,
 "털 때 안 털으니 그렇지!"라고 대답하더니...
 썰렁개그도 아재개그도 아니고, 질문도 대답도 왠지 <덤 & 더머>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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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밥 먹고 돌아와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 조립하고,

 서재 밖 평상에 점등하는 것으로 오늘 하고자 했던 일은 다 했습니다.
 서재 안에 켜던 다이소표 작은 트리는 올해는 그냥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트리를 주섬주섬 챙겨 넣던 기억이 어제 같은데, 시간 참 화살처럼 빠릅니다.
 나도 그렇게 옛사람이 되어가고 있겠고...

 

 
 202311192445일
 organ & chime-WhiteChristmas

 -by, ⓒ 성봉수 詩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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