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나절 잡부 품 팔고 돌아와 처삼촌 묘 벌초하듯 씻고 건너와 자싯물통에 담가놓고 간 설거지부터 하고 습관처럼 서재에 앉는다.
아무래도 서재에 빛이 너무 조금 드는 듯싶어 차양에 끼워 놓았던 스티로폼 한 조각을 어제 빼버렸는데, 빗방울 떨어지는 모습이 더 생생해서 좋긴 한데 이웃집 벽에 매달린 에어컨 실외기와 창이 한눈에 들어와 영 거슬린다.
어차피 하늘도 보이지 않는데, 비 그치면 도로 끼워 놓을까 어쩔까...
중얼거리며 생각하니, 밤낮을 뒤바꿔 사는 인간이 볕 타령하는 꼴이 우습다.
비를 맞으며 품팔다가 문득(정확하게는 오랜 생각이지만) "비 피할 곳이 없는 야속한 세상"이라는 자조.
요즘의 건축물은 하나같이 두부모 잘라내듯 반듯하니, 소나기라도 만나면 비 피할 곳이 없어 난감하다. 남의 집 처마 아래서 비를 피하고, "들어와서 비나 피하고 가셔!" 그 흔하던 마음 씀이 오랜 이야기가 아닌데 세상이 갑자기(3~40년을 갑자기라고 하니 이 또한 얼빠진 말이다만, 쩝!) 많이 변하긴 했다.
첫 커피를 마시는 동안 참새 한 쌍이 차양 아래로 들어와 젖은 털을 고른다.
그 모습을 바라보니 아침의 생각을 어디선가 전해 들은 듯도 싶고, 마치 내가 큰 덕이라도 쌓는 양 마음이 흐뭇하다.
아내가 어제 혈압으로 쓰러진 내 중핵교 동창 문상 다녀온 이야기로 아침부터 호들갑이다.
'부인이랑 지원여?'
"아닌데..."
'그런데 뭐하러 가?"
"지난번에 집에 초대도 했고, 뭐시기가 같이 가자고도 하고, 안 됐잖아요!"
"퇴원하시면 꼭 의사 상담받고 혈압약 복용하셔야 합니다. 일반 혈압으로는 측정이 안 되고 스트레스성 혈압 측정하셔야 해요. 다리야 하나 잘라도 살 수 있지만, 혈압은 방치하면 순간에 돌아가십니다. 특히 선생님같이 스트레스성 혈압이 높으신 분은…. 꼭 명심하세요! 많이 높습니다"
오래전 무릎 수술 때, 마취를 담당했던 여의사가 수술 후 일부러 병실로 찾아와 당부한 말.
그래서 먹기 시작한 혈압약.
고개를 갸웃거리며 약을 처방해 주던 동네 의원 의사가 "혹시 어지럽다거나 기운이 빠진다거나..." 두 달을 계속 묻더니 셋째 달부터는 다른 약(검색하니 가장 약한 단계의)으로 바꿔 처방해 지금껏 먹고 있는데.
두 달 전. 그리고 이번 달.
약 처방 때 측정한 혈압이 높다.
약 타러 갈 때마다 125~80을 유지했는데...
'다음 달에도 또 그러면 아무래도 약을 한 단계 윗것으로 바꿔달라 상담해 봐야겠다' 마음먹고 있는 차인데, 맨정신으로 잠들었다가 머리가 너무 아파 잠에서 깬 것이 근래 두 차례나 되다 보니 은근 마음 쓰인다.
평소에도 신경을 많이 쓰면 두통이 있긴 하지만, "목디스크가 심해졌나 보다..."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잠에서 깰 정도의 경험은 없었으니 당황스럽다.
찝찝한 마음에, 다음 달 약 처방 받으러 가기 전까지 상시혈압을 체크해볼 생각으로 어머님 쓰시던 혈압계를 아무리 찾아도 오리무중이고(어디서 나오려니 했었지만….) 그래서 새로 하나 장만할까, 요 며칠 온라인 숍을 기웃거리던 참인데...
아내의 호들갑에 뒤돌아서며 속엣말로 중얼거렸다.
'어이, 옆방 아줌마. 불쌍할 것도 많다. 자기 코가 석 자인 줄도 모르고...'
그나저나, "풍수지리학 박사"인 그 동창은 자기 묏자리는 명당으로 봐 놨는지 모르것네.
최희준/하숙생 mix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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