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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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면치기

by 성봉수 2021.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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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면, 밥 먹을 때 말 한마디 없이 씹는 소리도 안 들리게 젊잖게 먹는지,
00는 가정교육 제대로 받은 양반집 자식이 틀림없어."


-하숙집 아줌마.


 내 유년.
 "밥 먹으며 말하면 복 나간다"라고 할머님께서 말씀하셨고,
 아버지와 함께 앉은 밥상머리에서는 행여 무슨 꾸지람이라도 하실까, 잔뜩 주눅 들어 멀리 있는 반찬에는 손조차 뻗지 못했다.
 어쩌다 염려의 말씀을 듣고 입에 밥을 물고 눈물을 흘릴 때면,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밥이나 다 먹걸랑 예기해요…."라고 어머니께서 거드셨는데, 그러면 오히려 그 말씀이 어찌나 더 서럽든지 울대를 큭큭 거리는 기이한 소리까지 새어 나왔지.
 그러면 이윽고 터져 나온 아버지의 호통,
 "내가 뭐라 했는데 울어 울기를! 사내놈의 새끼가 눈물이 그렇게 흔해서 어디다 써먹어!"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내가 내 새끼를 낳아 기르면서야,
 특별한 말씀도 아니었을뿐더러 얼굴 맞대고 있을 시간이 밥상머리뿐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왜 그렇게 주눅이 들어 지레 눈물부터 흘렀는지 모르겠다.

 요리와 먹방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부터 등장한 "면치기"라는 단어,
 출연자는 "후루룩~"소리를 크게 내며 면을 입 안으로 한 번에 많이 끌어넣을수록
 "면치기의 달인"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나 또한 그런 방송을 아무 거리낌 없이 웃어넘기며 보곤 하는데,
 어느 날 문득,
 "밥상머리 교육" "밥상머리 예절"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가정교육"이라는 것이 "밥상머리"에서 시작되고, "밥상머리 예절"이 곧 "가정 교육"이라는.
 핵가족의 인구 변화와 저녁이 없는 경쟁 사회의 심화는 "밥상머리 공동체"의 해체를 불렀고, 이는 "밥상머리 교육" "밥상머리 예절"의 상실로 이어졌다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밥상머리 교육" 운운하는지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 집 세 딸이 칭찬받을 생각으로 시부모 앞에서 행여 "후루루룩" 면지기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현충일 아침.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후두두둑"
 그 소리가 면치기 소리로 들렸다.
 전날 오후 1층 옥상에 넌 내 빨래와 마당에 가득 걸린 빨래 생각에 후다닥 뛰어나갔지만,
 여우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쏟아진다.
 만세다.
 비가 한번에 너무 많이 쏟아지니 그냥 우두커니 바라볼 수밖엔 어쩔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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