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멱국 한 그릇 퍼다 놨어요. 셋째는 이따 일어나 차려 먹는다니 그냥 한 끼 말아 먹어요"
그렇게 삼월이 언니가 출근하고 세 시간쯤 지났을까?
부엌문을 열고 마주한 식은 밥과 국.
음산한 풀섶을 헤치고 도착한 산신각, 거미줄이 출렁이는 엉성한 대들보 아래 호랑이를 타고 앉은 긴 수염의 산신님이나 칠성할매님의 탱화 앞에 올려놓은 제물이거나. 단청이 모두 벗겨진 어디 오래된 사찰 한구석 삐걱대는 마루를 섬뜩하게 밟고 올라선 명부전 부처님 앞에 고인 잿밥 같다.
그래서일까? 당연하게 레인지에 돌렸을 밥과 국을 그대로 쟁반에 담아 마주 앉았다.
하... 혓바닦을 깨물었다.
눈물이 찔끔 나도록 엄청 아프다.
유일한 아비의 능력, 축하 케이크 사주는 것.
하던 대로라면 저녁 무렵 사 오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교정 본 원고 전달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하늘이 꾸물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비 쏟아지기 전에 다녀오는 것이 좋을 듯싶다. 집을 나서고 보니 장날이다. 장 가운데로 휘이 돌아 출판사에 들려 원고 맡겨 놓고 케이크를 사서 돌아오는데, 방앗간을 지나쳐 돌아오려니 뭔가 잃어버린 듯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와 건너채 냉창고를 헤집어 케이크와 샴페인을 넣어두고 건너와 현관문을 여니, 잠시 잠깐 혼자 집 지키느라 쓸쓸했던지 삼월이가 쪼르르 달려와 꼬리풍차를 돌린다.
털갈이를 모두 마치니 토깽이처럼 미녀가 됐다.
'뭐예요?'
"모르셨어요?"
'아니 그래도...'
근무하던 업장에서 슬그머니 나와 공중전화에 흘러나오는 간호사의 차가운 반문에 나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빠지며 무릎이 턱, 꺾였던 날.
급여는 줄고 인원은 감축하던 그때, IMF 고단했던 시절.
먹고 사는 것이 무엔지 납작 엎드려 지내야 했던 그 시절.
아내가 출산하는데 곁에 있어 주기는커녕, 아마 이때 어머님께서 큰 수술을 하셨는데도 하나뿐인 아들이 곁을 지키지 못했다. 전신마취에 개복 수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남 얘기처럼 와닿지 못했으니 참 철딱서니 없었다. 후회되는 것이 그것뿐이랴만 돌이키면 이리 가나 저리 가나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을 직장이고 뭣이고 사람 노릇 못한 것이 두고두고 바보스럽다.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26년 전의 그때 그 업장이 변함없는지 궁금해 검색하니 여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양이다.
관광 온 본토인들이 인근 호텔에서 빠짐없이 들리던 코스. 뒷짐 지고 어슬렁거리다 마작하러 가거나 골프를 치러 다니는 게 사장의 일상이었던 곳. 대로변 인접 시장 안 코너의 건물이었으니, 업장의 매출에는 별 신경 쓰지 않던 곳. 바퀴벌레가 파리보다 더 많았던 곳(내가 그래도 규모가 있는 업장 여러 곳에서 근무했지만, 여기처럼 바퀴벌레 많은 곳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기억이 없으니...). 적어도 십 년 후에는 나도 이리되리라 자신만만하며 고생을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그때.
그렇게 잠시 머물다가 물거품처럼 떠나온 곳.
퇴근하는 삼월이 언니, 아들 차를 타고 왔고 아들은 누이 케이크 사러 갔단다.
'사왔는디?'
다급하게 전화를 꺼내며 얼라 지청구 하듯 씨부린다.
"그럼 말을 해야지!"
'???'
우리 못난이.
다래끼도 참 드럽게 시도 때도 없이 나더니, 지금 보니 참 고약하게도 생겼다.
내가 지금 생각하니 스물다섯 이후로 오늘까지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게 지냈다. 우여곡절 사연 많은 까닭이겠으나, 돌이켜 너도 그런 시간이 오지 싶다.
네가 그런 시간에 닿았을 때 후회 없도록, 일분일초 허투루 가벼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이루며 아프지 말고 건강하거라.
202308092734수
활짝웃어요mix젊은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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