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폭식
본문 바로가기
가슴에 묻어둔 便紙

행복한 폭식

by 성봉수 2023. 8. 17.
반응형

 

 

 

 

 

 역시 에어컨 켜지 않고 잘 버틴 날.
 갑자기 삶은 달걀을 먹고 싶어졌습니다.
 탄수화물 섭취 없이 보낸 하루가 벌써 저물어 아랫배에서 맹꽁이 우는 소리가 요란하니, 문득 당긴 달걀의 구미를 멈출 수 없는 노릇입니다.
 
 삶은 달걀을 생각하니 뻑뻑함을 가실 감로수도 필요합니다.
 마침 네 알 남은 냉장고 달걀도 사다 놓은 지 오래되었으니 겸사겸사 집을 나서 동네 마트에 어슬렁 다녀왔습니다.
 두 알은 반숙으로 나머지는 완숙으로 삶았고요, 삼월이 언니께서 퇴근하며 슬그머니 한 접시 디밀어 놓은 족발 몇 첨을 덜어 상을 차렸습니다. 완숙 네 알은 각 네 등분해 질소함량 높은 간장에 버무렸습니다. 삶은 달걀 하나면 소주 두 병을 먹던, 부글부글 끓는 막걸리에 이렇게 삶은 달걀로 마주 앉던 지금은 세상에 없는 친구와의 가난한 줄 몰랐던 젊은 여름날을 생각했습니다.
 '지금 뭐하니?'
 "응, 입대하면 운전병 하려고 면허 따러 학원 다녀"
 '엥? 방위도 운전병이 있어?'
 "엉! 방위는 운전병 없니?"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배꼽 빠지게 웃던, 모두가 휴가 떠나 한산한 거리 뒷길 탁주집에 마주 앉았던... 

 완숙 달걀 반 쪽 남긴 것을 고명으로 얹어 냉면 한 그릇 뚝딱 말아 시원하게 먹고, 무늬만 에스프레소를 타 서재에 앉아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나와 내가 마주 앉은,
 참 행복한 폭식이었습니다.

더보기

㉠ 삼월이 언니께서 아드님 밥반찬 겸 퇴근길에, 시장에서 사다 슬그머니 덜어 놓고 간 족발 편육.
㉡ 2층 화분에 심어 계절 내 따 먹고 남아 새콤 달곰 간장 만들어 담아 아작아작 잘 삭혀 먹고 있는 고추장아찌.
㉢ 족발에 함께 먹으려고 냉장고에서 찾아낸(출처 추정-삼월이 언니) 낙지젓.
㉣ 오이도 없고 겨자 개기는 귀찮고, 몇 해 전 동생이 보내준 매실로 담근 오메부시. 먹는 이 없으니  채 썰어 적당히 염기 빼 나 혼자 먹고 있는... 새콤 짭짤하게 얹음.
㉤ '뚜껑을 따면 다 먹어야지 저 짓을 어찌하나?'라던, 드라마나 영화 속의 크리스털 병에서 따라 마시던 양주 '온더 락스(on the rocks)'. 주력 40년을 넘어서니 이제야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이렇게[ 또 시간에서 배우는...

 


202308162958수
Percy_Faith_His_Orchestra-Theme from_ A_Summer_Place
연우귀국

 

 

반응형

'가슴에 묻어둔 便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현(瞑眩) 현상.  (2) 2023.12.05
충격파.  (0) 2023.11.06
하늘나라 동화  (1) 2023.08.16
아름다울 날들을 위해.  (0) 2023.08.11
고맙습니다. 잘 살아 있습니다.  (0) 2023.07.17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