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
오래 계획했던 행사나 약속 혹은 모처럼의 여유로운 여행을 고대했던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반가운 비 예보.
선영의 보식한 떼 외엔 기다리거나 반가울 특별한 이유 없던 비 소식. 그런데도 반갑고 기다려지던 비 소식. 딱히 손에 잡히는 무엇은 없었어도, 서재 창밖 차양에 운율 없이 자유낙하 하는 소리와 오래된 마당의 잡소리를 정적으로 집어삼키는 그 소리와 그 소리를 아우르는 바람종 소리와 한편에서 무념으로 발가벗고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나와 그 모든 것이 담긴 시간의 액자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을 나를 상상하는 알 수 없는 설렘.
단편으로 정의하자면 뭔지 모를 조급함에 허둥대던 일상을 멈추는 "여유에 대한 갈증"이었지 싶은데...
잡부에서 돌아와, 이식 보름 지나 본잎 나온 호박과 여주와 토란에 첫 시비 하고, 파종하고 대책 없이 뭉텅이로 솟은 양귀비꽃 대충 솎아 서너 군데 이식하고, 해당화 햇볕 가리도록 자란 불두화 햇가지 좀 쳐내고, 비 설거지할 곳 없는지 둘러보고...
11시가 지나며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
기대만큼 흡족한 양은 아니지만, 밤도깨비처럼 마당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먹으며 반갑게 맞았다.
-0504목
"어린이날이데 올해는 까까 안 사줄 껴?"
며칠 전, A 시인께서 살펴 달라고 보내온 집필 중인 중편 소설. 주말에나 시간을 내야겠거니 차일피일하다가 파일을 막 열려는데 걸려 온 전화.
집 앞에 도착하기 전 서둘러 컴을 닫고 근교 식당에서 소머리 국밥으로 축하 만찬 하고 경치 좋은 찻집에서 담소하다 귀갓길에 떨어진 식모커피 사서 원상 복귀.
설거지통에 모두 들어가 있는 그릇들. 끼마다 건져 물 한번 휘이 뿌려 사용하길 며칠째. 이젠 그것도 귀찮아 삼월이 언니가 담아 디밀어 놓은 오이소박이. 다 먹고 남은 익은 멀국이 아까워 버리지 않고 냉장고에 그냥 넣어 두었던 일회용기. 그 일회용기를 꺼내 밥 한술 덜어 썩썩 비벼 저녁을 때우고 앉았는데 빗소리가 거세다.
그렇게 기다리며 상상하던 액자를 손에 쥐었는데 정작 점점 조급해지는 맘은 왜일까?
기다림의 시간과 맞은 시간 사이에 달라진 것이라고는, 열린 기웃거리던 문.
그런데 왜 이럴까?
잠깐 술 생각도 했지만, 머뭇거리다가 길 건너 편의점 무인 전환 시간이 지났다. 우산 쓰고 역 앞까지 다녀올 정도로 간절하지도 않다. 아니, 조급하던 마음이 우울로 변해 발 두덩에 납덩이처럼 무겁게 매달려 있어 발짝을 뗄 힘이 없었다.
-0505금
그렇게 비를 맞으며 길거리에 들러붙은 신문지처럼 비를 맞으며 밤이 가고 맞은 아침.
마당을 휘이 둘러보고 용변 보고 삼월이 밥 챙겨주고 커피 한잔하고 작정하고 설거지를 해치우고.
다른 것 모두 손 놓고 소식을 기다리던 오늘 행사.
방금 도착한 "우천 취소."
어항 물고기들 밥도 챙겼고, 이제 만만한 라면 삶아 아점 한 끼 여유롭게 먹어야겠다.
비가 뻐끔한 오래된 집 마당, 바람종 소리가 유난히 거세다.
202305061205토입하
도신스님-님의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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