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 기일.
오후 반나절 잡부 마치고 돌아와 비에 젖은 찝찝한 몸을 씻고 잠시 늘어졌다가, 그제 할아버님 제사 모신 전 몇 첨을 데워 저녁을 마친다.
배가 고팠지만, 아버님 제사를 모셔야 하니 그러고 나서 그때 채울 속을 비워 놓는 게 현명하겠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게 일단 허기를 모면하고 24시간 전에 담가 놓은 설거지를 하는데 서재 컴에서 랜덤 재생시켜 놓은 음악이 '루비나'를 모시고 나온다.
나는 그때 그 눈 나리던 도심, 번성했던 상가 중앙로를 생각한다.
아버지 두툼한 검은색 양품점 순모 오버코트를 내 것으로 걸치고 발 토시로 바짓단을 옭아맨 그 거리의 나를 생각한다.
토시 아래 두 줄의 끈으로 마무리한 뾰족한 코의 주황색 구두를 생각한다.
요철 없는 매끈한 굽의 신사화, 취기가 아니었더라도 미끄러지고 자빠졌을 그 눈 나리던 밤을 생각한다.
저녁마다 포장마차 리어카를 끌고 나오던 사연 많은 형님을 생각한다.
밀치고 들어설 때 버석거리는 소리가 나던 주황색 비닐 포장을 생각한다.
눈이 시큼하던 메케한 연탄가스 냄새를 생각한다.
바구니에 담긴 삶은 달걀을 생각한다.
흔들리던 깐드레 불빛을 생각한다.
옹색하게 뚫어 놓은 지붕 환기구로 쏟아져 들어오던 눈발을 생각한다.
석쇠에 구운 꽁치를 생각한다, 닭발을 생각한다, 김밥을 생각한다, ...생각한다.
사연 많은 언니 부부를 돕고자 잠시 내려왔던 처자, 세련된 서울 말씨의 동갑이었던 처제를 생각한다.
여자라면 앞뒤 없이 질척거리던 콧구멍 큰 친구를 생각한다.
그 친구의 실없는 긴말 받아준다고 눈 흘기며 감추어 나무라던 만삭의 언니를 생각한다.
하루아침 그 거리에서도, 도시에서도 사라진 그 포장마차와 어설픈 마부들을 생각한다.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술에 취해 휘청이는 게 일상이던 날들.
그 가릴 것 없고 무서운 것 없이 간을 배 밖으로 내놓고 어디에 서 있는 줄 몰랐던 그 20대 청년을 생각한다.
음악다방을 생각한다.
학사주점을 생각한다.
언제부터인지 지금은 끊긴, 눈알이 빠지도록 올려붙이던 주취의 토악질을 생각한다. 눈팅이 밤팅이 되었던 종종의 쌈박질을 생각한다.
그 모든 날의 처음과 끝에 서 있던 사람.
그 긴 머리칼의 여자를 생각한다.
돌이키니 소녀였던...
그 눈 나리던 황홀한 아픔의 날들을 생각한다.
202308293005화
-by, 詩人 성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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